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_  2010.10.4
내가 가진 책은 2009 년 가을 ‘해누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이 말고도 국내 여러 출판사의 책들이 있다.

기원 2 세기 말의 로마 전성기에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이어 훌륭한 통치를 했다고 해서 五賢帝(오현제) 시대라 한다.

그 마지막 황제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아우렐리우스 황제이다. 풀 네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라는 긴 이름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로 불멸의 명성을 얻은 로버트 기번 역시 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으며, 블록 버스터 영화 ‘글라디에이터’도 이 현명한 노 황제가 죽으면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러니 서양에서는 무척이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먼저 명상록의 구절들을 일부 소개한다.

“겨를이 없어서, 이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자주 불필요하게 하지는 말라고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의무들을 소홀히 한 데 대해 급한 볼일들이 있어서 그랬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몰라서 불행해지는 법은 없지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 질 것이다.”

“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승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너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라.”

“사람들은 깊이 명상할 만한 곳을 찾아 시골과 바닷가, 산속을 찾아 다닌다. 당신도 그런 장소들을 열렬히 갈망하는 습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가장 저속한 사람들의 특징이며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 왜냐면 네가 물러가서 명상에 잠기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너는 언제든지 네 내면 속으로 스스로 물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상록은 이처럼 길지 않은 단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앞의 마지막 문장을 한 번 생각해보자.

탁한 세상에서 물러나 명상의 세계에 고요히 들고 싶다는 이유로 전원이나 산속, 또는 한적한 바닷가를 찾아가는 것은 가장 헛된 짓이라는 얘기를 아우렐리우스는 하고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우리의 內面(내면) 속으로 침잠하여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것을 그와 같은 특정 장소를 통해 얻으려는 행동은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라 말하고 있다.

복닥거리는 도심에 살아도 창을 닫고 향을 한 대 피워 올리는 그 순간 바로 仙境(선경)이 펼쳐질 수 있다는 이 말, 노자나 장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농사를 짓고자 전원으로 돌아간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물질문명에 찌든 도심을 떠나 삶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전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는 그저 ‘멋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자는 시골 사람과도 겉돌게 되고 도시에 사는 사람과도 그럴 것이며 나아가서 혹여 돈이라도 궁해지면 다시 도심으로 돌아와 치열한 생존 경쟁에 들어갈 것이니 당초 벗어나고자 했던 숨 가쁜 물질문명에 다시 속박을 받게 되리라고 평소 나는 생각해 왔는데 이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가르쳐 준 말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슬로 라이프, 슬로 시티와 같은 개념, 천천히 게으름 피우며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내 생각에 그런 곳을 찾아가 며칠 정도 더 여유가 된다면 몇 달 정도 살다오는 것 나쁘지 않다. 그건 당신의 삶을 누리는 것이고 나름의 상당한 럭셔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그곳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운다면 그건 자칫 어리석음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곳에 가서 살려면 무엇보다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당신이 처한 도심에서 더욱 더 치열하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도시 문명이 부여하는 다양한 편리함과 혜택들, 병원과 교육, 교통, 문화 시설 등등을 거부하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최근 웃기는 것은 전원에 살면서 열심히 나 이렇게 우아하게 느리게 게으름 피우며 잘 살고 있노라고 오늘도 바쁘게 정신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마트 폰의 트위터를 통해 엄청 자랑해대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의 허세와 자랑에 낚여들지 말기를, 그 양반 결국 돈이 많아서 전원에 살며 놀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전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 것이다. 내 눈에 그저 바보일 뿐인데, 그런 바보에게 당신이 낚인다면 당신은 더한 바보가 되는 셈이니.

전원으로 돌아가 명상에 잠기며 정신적 풍요로움을 누리고자 하는 삶은 결국 물질적 풍요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런 가식된 삶의 풍조는 과거 로마제국 시대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었으며 지금 한국사회도 2000 년 대 들어 양극화와 함께 일부는 극도로 사치스러워지면서 생겨난 末流(말류) 현상이라 본다. 쉽게 말해 가짜!

한가로움의 그 그윽한 맛은 바쁜 당신이 아니라면 느껴볼 수 없는 맛이다. 모든 한가로움은 오로지 忙中閑(망중한)에서만이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오로지 한가롭게 되면 또한 지옥이고 권태로움일 것이다. 陰陽(음양)의 이치이다.

다시 돌아와서 명상록은 원 제목이 아니라, 나중에 붙여진 것이고 원래 황제 자신은 노트 앞장에 단순하게 ‘나에게, To Myself’ 라고만 써놓았다 한다.

황제였지만 많은 시간들을 게르만 족과의 전쟁터에 나가 진두지휘한 그는 이순신 장군처럼 陣中(진중)에서 틈나는 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고 명상한 내용들을 글로 남긴  것이다.

이처럼 현인이나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산속이나 외진 전원에 살고 있지 않다. 바로 당신 곁에 그리고 복잡한 도심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예로부터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저잣거리에 은거한다는 말, 大隱隱朝市(대은은조시)란 말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이 책을 이 코너에 소개하게 된 것은 ‘스토아 철학’에 대해 일부라도 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공부하거나 연구할 때 처음에는 잘 모르다 보니 原典(원전)을 읽기 보다는 누군가 주석을 달아놓은 책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도 무방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원전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공자나 맹자의 사상을 알고 싶으면 論語(논어)나 맹자를 읽는 것이 우선이지, 논어나 맹자를 해석해놓은 현대학자들의 글에 치중하다보면 마치 이해한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은 그 학자의 개인적 주관 또는 편견 때문에 공자나 맹자의 주장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먼저 소개하는 까닭 역시 스토아 철학이 어떤 것이었던 가를 독자 스스로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은 로마 세계가 기독교화되면서 애써 무시하고 부인하려 했던 사상이다. 하지만 기독교화된 로마와 그 이후의 중세 신학에 있어서 스토아 철학의 높은 가치는 사라지지 않고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

기독교화된 서구 사회는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정도만 그나마 인정할 뿐 스토아 철학의 탁월한 가치를 부인해왔지만, 실은 스토아 철학이야말로 서구 인들이 잘 살다 가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 가를 성찰한 철학의 精髓(정수)라고 하겠다.

당신이 이 책을 읽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서양 철학의 진정한 가치인 스토아 철학과 인연을 가지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소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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